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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으로 데려가주세요. 친애하는 천사님, 저를 낙원으로 데려가주세요. 인간이 없는 낙원으로 데려가주세요. 저를 소멸시키는 낙원으로 데려가주세요. 천국은 저를 인간으로 존재시키지 않을 터이며, 그것은 곧 나我라는 존재의 소멸입니다. 인간만이 저를 존재케하며, 동시에 고통스럽게 합니다. 탄생은 축복이라 함은 당신의 입장에서는 저주일 것이며, 저주를 받은 자는 인간이라는 한 존재로 고통을 살아갑니다. 고통은 항상 우리의 넋에 있으니 고통만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듭니다. 우리는 소멸을 축복이라 일컬으며 축복의 길을 걷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항상 축복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와 축복은 상반되거늘 이토록 닮았습니다. 고로 당신과 나는 닮은 것입니다. 소멸된 당신을 닮고 싶습니다. 소멸되었다는 것은 존재를 잃었다는 것은 어떤.. 2022. 10. 12.
봉선화 길거리에 떠도는 작고 소소한 사랑이 느껴지는 이야기가 있다. 천에 색을 옮겨 물들이는 것처럼, 봉선화의 색을 손톱에 옮겨붙여 결과를 고이 간직하면 첫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사랑이야기에 간질간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곧잘 관련 서적을 읽거나 사랑스러운 어구를 입으로 직접 읊조리는 둥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며 사람을 찾아 나서기도 하는 15살, 그 나이의 글레나 앨리시야는 평범한 소녀들과는 조금 달랐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가 마음을 품은 이가 있었으므로 완전히 다르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여느 소녀들처럼 로맨스류 서적을 읽고 떠들지는 않았다는 말이었다. 글레나는 지나가는 소녀가 제친구들과 재잘 떠들며 길거리에 놓고 간 이야기에, 제 손을 들어 손톱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굳은 살이 박혀.. 2022. 10. 1.
길바닥에 버려진 형체가 있다. 길바닥에 버려진 형체가 있다. 깃털을 똘똘 뭉친 것이 새하얀 솜털을 한군데에 뭉쳐 흙탕물에 담근 것 같았고, 버려진 것이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짐승새끼를 닮았다. 그것은 숨통이 비틀렸다. 더이상 숨 쉴 수 없는 죽은 생명을 건들어보아도 미동조차 없다. 평화의 상징이 이것이라 정했거늘 인간은 방치하고 매도한다. 버려진 평화는 죽었다. 이미 죽어버린 것을 뭐하러 찾나, 평화를 스스로 짓밟은 개체에게 구원은 없다. 구원을 내치고 평화를 짓밟는 길의 끝에 있을 건 바닥을 알 수 없는 아득한 강인지라, 이윽고 강에 빠져들고 절망을 고향으로 정한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2022. 8. 23.
로젤리오 라니에 로젤리오 라니에의 인생의 첫 시작은 어리고 사랑스러운 누이와의 입맞춤이었다. 동생을 매우 아끼는 누이의 입맞춤은 천상의 아기가 맞춘 입맞춤처럼 가볍고 따뜻했다. 로젤리오는 그런 누이를 보며 자랐고, 가문에 적응해나가는 그를 보며 그도 가주의 말씀을 따라 명령을 이행해나갔다. 이 과목을 학습하라, 근시일내로 좋은 성적을 취득하라, 마법학부터 차근차근 시작하자꾸나, 네, 아버지. ... 이런 식으로. 라니에가문의 현가주, 엔리코 라니에의 시선은 엄격하지 않았다. 누이의 눈짓처럼 부드럽고, 한없이 따뜻하여 그들의 입밖으로 나오는 노래는 모두 자장가 같았을 정도였다. 라니에가문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흑마법에 좋은 성과를 이루지 못해도, 그들은 하대와 비난을 하긴 커녕 오히려 로젤리오에게 격려의 말을 건넸다. 사.. 2022. 8.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