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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화

by 弟者 2022. 10. 1.

길거리에 떠도는 작고 소소한 사랑이 느껴지는 이야기가 있다. 천에 색을 옮겨 물들이는 것처럼, 봉선화의 색을 손톱에 옮겨붙여 결과를 고이 간직하면 첫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사랑이야기에 간질간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곧잘 관련 서적을 읽거나 사랑스러운 어구를 입으로 직접 읊조리는 둥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며 사람을 찾아 나서기도 하는 15살, 그 나이의 글레나 앨리시야는 평범한 소녀들과는 조금 달랐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가 마음을 품은 이가 있었으므로 완전히 다르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여느 소녀들처럼 로맨스류 서적을 읽고 떠들지는 않았다는 말이었다. 글레나는 지나가는 소녀가 제친구들과 재잘 떠들며 길거리에 놓고 간 이야기에, 제 손을 들어 손톱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굳은 살이 박혀있었지만 여전히 곱디 고운 손이었다. 마을의 인간들을 돕고 살았는데도 타고난 고운 손은 생채기도 나지 않아 말끔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홀로 몸을 옮겨 직접 봉선화를 손톱에 물들이고 빠안히 쳐다보노라니 금세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 떠올라 뺨을 붉히고 자연스레 써진 인상을 신경쓰지도 못하였다. 그런 류의 소문을 믿지는 않지만 그대와 이어지고 싶다는 마음으로 인해 벌인 짓일 테다. 이후에 만난 그대와 몇번이고 만남을 가졌지만 그것은 봉선화가 지워졌을 무렵까지도 계속되었다. 한마디로, 글레나가 내심 품었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피르와 떨어져지내던 시절의 글레나는 그런 소망을 품을 수 있을 리가 만무하였다. 정신이 나간 상태로 강자를 살해하던 그의 손톱은 거친 돌부리와 멩이, 모래에 긁혀 성치못한 상태였다. 떨리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글레나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에 인상을 썼다. 입을 벌리면 튀어나오는 건 더듬 외마디 뿐, 제대로 구사된 언어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떠오른다. 떠오르는 간절한 감정과 소망에는 세피르라는 이름이 수면위로 올라올 것이었다. 금방 뇌리에 찾아온 고통은 그 이름을 부를 수 없게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명백한 것은 사랑하는 이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 미래에 그대와 만나게 된다면, 모든 것이... 원만하게 해결되어 평화로운 세상에 당신과 살게 된다면, ... 또한번 추억을 회상하며 봉선화를 물들일 날이 올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