弟者 2021. 3. 19. 06:36

웃지 않는, 격식을 차린 복장의 여자는 화려움과 수려함을 겸비했고, 경직적인 자신감이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장미꽃들을 싸맨 꽃다발.

 

"애런 켄드릭 데 셀튼. 저와 결혼합시다."

"싫습니다."

단칼에 거절하며 피하지 않고 오롯이 바라보는 눈을 여자는 뚫어져라, 한 번도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격식을 차리느라 기계적인 면모를 보인다해도 이 여인이 하는 말 하나하나에는 무게감이 있었다. 한마디로, 격식을 우선 할 뿐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진실이라는 것이다. 세력융합을 목표로 한 청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비록 신과 함께하지 않아 공식적인 청혼은 되지 못했지만, 공식적인 청혼 이전에 사적으로 먼저 합의를 보아야하는 것이 원칙이기에 이리 몇 번이고 여인은 나에게 청혼을 하고 있다.

 

지금 나에게 격식있는 청혼을 하는 여인은 엘리아타 리메슨 바실레우스 드 휀올드라드. 휀올드라드 왕가의 둘째 왕녀다. 꿀을 바른 듯 윤기있는 머리카락을 지니고, 온갖 색이 뒤섞여 빛을 내는 눈. 이 눈을 바라보면 암흑에 잠길 듯 끌어당겨져 누구든 자연히 눈을 마주치게 된다. 빛인데 암흑을 품은 눈이라니, 모순적인 눈이었으나 그 모순이 사람을 끌어당겼다.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가 있는 왕녀님. 여성임에도 왕가의 특유핏줄 특징으로 키가 유독 커 거의 모든 인간들을 내려보았다. 다만, 그의 앞에 서있는 나는 그보다 키가 컸기에 엘리아타가 조금 눈을 굴려 올려다보아야했다. 

 

"더할나위없이 좋을 혼인처를 이리 단칼에 거절하는 남성은 세상에 당신을 제외하고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과 혼인을 한다면 제 앞날이 편해지겠지만, 제가 염원하는 일을 수행할 수 없게 됩니다. 금은보화도 때로는 독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들처럼.."

"애런, 참 냉정한 사람입니다."

"이미 알고 있었잖습니까?"

"... 후후. 네,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가시돋힌 말에도 여인은 기분좋게 웃으며 팔짱을 끼고 자신감있는 미소를 띠며 나를 바라보았다. 

"꽃다발은 가지고 가십시오. 이 아름다운 꽃은 오직 당신 만의 것이니 당신이 잘 관리해주셔야 합니다."

"..받지 않,"

"받으십시오."

"....하아, 알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엘리아타."

 

왕녀임에도 그를 격식있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고 이름을 입에 담는다. 이는 신분의 위계질서가 허술하기 때문이 아니었으니, 만약 다른 사람이 나의 모습을 보았다면 경박하고 무례하다며 결박한 뒤 왕가의 기사들에게 끌고 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두 사람이 친분이 넘쳐 가능한 일이지, 본래라면 상상도 하기 힘들 일은, 우리의 일상이었다.

나는 그에게 5번째의 청혼을 받은 뒤 후작저로 돌아가기 위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셀튼 후작님!"

 

주근깨를 얼굴에 달고 사는 붉은 머리의 아이가 나에게 다가왔는데, 그의 손에는 신문이 돌돌 말려 들려있었다.

리셸, 내가 길을 다니다 골목길에서 굶주리고 있는 아이를 거두어 성에 살게 해둔 당찬 아이다. 성에서 사는 대신 소식통의 역할을 해 꽤 유능했다. 

 

"리셸, 새로운 소식을 가지고 왔구나."

"에셀레드가문에서, 읍!"

"그 이야기는 후작성으로 돌아가서 하자꾸나."

"..으으읍.으으으읍."

"입을 가렸으면 말을 그만하렴."

"흐흥흥흠..."

"..."

 

아이의 입을 가리며 마차에 반강제로 태운 뒤, 자리에 앉아 손을 떼어 내 아이의 입이 자유롭게 노나니게 두자, 아이는 속사포로 이야기거리를 쏟아냈다.

"후작님!! 글쎄요, 글쎄~ 에스텔르가문의첫째영식이비타가문의영애에게광장앞에서공개적으로고백을했는데차였대요!!!!"

"....후우, 성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하자했더니."

"그치만~ 너무 후작님께 알리고 싶었는걸요!"

아이는 마차의 안에서 위험하게 내 무릎에 손을 대고는 주저앉아 올려다보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아이의 옆구리에 두손을 넣어 제대로 서게 한 뒤 내 옆자리에 옮겼다.

"차라리 내 옆에 앉아 있어라."

"네!"

 

해맑은 아이는 산만할 뿐 말은 참 잘 들었다. 나는 아이를 힐끔 보고 제대로 착석했다는 것을 확인한 뒤 작은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작은 소설책의 장르는 추리물. 평소에 검은 로브 주머니에 넣어두고 다녀 금방 꺼내 읽을 수 있었다. 

 

"....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보군."

"넹!"

지나친 시선이 느껴져 독서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시 아이를 돌아보니, 밝은 어조로 아이는 나의 말에 응답한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니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 밖에. 한숨을 쉬고 오늘도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

 

어느새 후작성 문 앞으로 도착한 마차는 잔잔한 진동이 울리더니 멈추어 섰다.

먼저 마차문을 열어 나간 뒤, 아이를 안전히 내려주어 성문을 지키던 기사들에게 눈짓을 한다.

눈짓을 받은 기사들은 성문을 열어 젖힌다. 성문은 무겁고 우렁찬 소리를 내어 우리를 반기었다.

 

-

평민들과, 귀족들을 안고 나라를 발전시키는 왕국, 휀올드라드.

인간은 짐작하기도 어려울 옛날, 신들은 공백의 세계에서 태어났다. 

신들은 중앙, 외방의 구역을 나누어 전담을 정했고, 중앙의 신들은 인간의 세상을 만들었다. 인간의 세상에는 생명체가 있어야하기 때문에 생명을 생성했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마테르-레우코테아 세계.

첫 생명들을 잉태한 것은 태양의 신, 마테르. 

신의 기록서에 의하면 마테르 여신, .. 다시 말해 태양의 신은 백금발과 빛이 뿜어져나오는 눈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그 빛은 무척이나 강렬해 감히 인간은 눈동자를 쳐다보기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있다. 

중앙의 신들은 자신들이 만든 인간의 영역을 장악해 힘을 행사하였고, 자연스레 인간의 문화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이 말은 즉슨, 왕가에도 신의 힘이 영향을 강하게 끼치고 있다는 뜻이다.

그 영역에는 각자의 귀족가문도 포함된다. 각 귀족가문에는 하위 신들이 존재해 해당 가문의 자식에게 가문의 고유재능, 즉 이능을 부여한다.

예를 들어, 내가 부여받은 특수한 능력은, 순간적으로 주변의 마나를 자신의 마력으로 바꾸어 초인의 힘을 낼 수 있다, 정도다.

꽤 쓸만한 능력이라 대부분의 일에 유용하다. 정교함을 요구하는 업무에는 쓸모가 없지만 말이다.

 

"애~런~!!"

"윽."

새까만 눈동자의 눈부신 미인이 나에게 달려오다 덮친다. 속수무책으로 덮쳐진 나는, ... 허리에 순간적으로 힘을 넣어 지탱해 넘어지지 않았다. 

"블레이크."

"웅~?"

".. 이런 행동은 그만두시오."

"... 흥~ 애런은 너무 딱딱해!"

"그게 하위신이 하실 말투십니까.."

"..."

히죽, 우리 가문의 하위 신, 블레이크가 입이 찢어질 듯 환하게 웃었다. 

블레이크의 뒤에는 똑같은 갈색 빛깔의 머리칼을 지닌, 새하얀 눈동자의 미인이 멍하니 서있었다. 이 미인 또한 하위신, 이름은 새까만 눈동자의 하위신과 똑같이 블레이크.

그들은 쌍둥이라 외모도 무척 유사한 데다, 이름도 같아 구분하기 위해 눈동자의 색으로 달리 명했다. 

새까만 눈동자는 흑의 블레이크, 새하얀 눈동자는 백의 블레이크. 셀튼 가문의 하위신은 쌍둥이었다.

".. 애런, 나를 봐."

흐느적, 백의 블레이크가 다가와 새하얀 눈을 크게 떠, 나를 집어삼킬 듯이 응시한다.

그리고 곧, ... 새하얀 눈동자는 점점 커져 나를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내 앞은 후작성이 아닌, 백의 세계가 된 것이다. 온통 새하얘 주변에 사물은 눈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등이나 태양이 없음에도 굉장히 환했다. 공간 자체가 빛을 내고 있는 것이다.

"... 이런 것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겁니다, 블레이크."

백의 블레이크는 불안증이 심한 탓에, 가문의 가주인 날 매번 시험하겠다며 자신의 안에 날 집어넣는다. 

불안이 그리 심하면 다른 방법을 쓰면 될텐데, 신들은 당연스럽게도 이런 상황에 처하는 인간들을 이해해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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