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궁지에 몰린 황금쥐

궁지에 몰린 황금쥐 (수정1회본) : 1회

弟者 2021. 8. 21. 06:20

"『케일론이라는 사내는 범상한 행세로 그에게 외치었다. '너는 우리 일족을 모욕하였다. 내 어찌 용서하랴! 곧 우리 일족이 너의 목을 치러 올 것이니, 너는 궁지에 몰린 쥐새끼 한 마리로 전락할 것이다! 사악한 마녀, 세미라미스여!』"

 

정확한 발음, 여린 목소리는 변성기로 인해 중저음으로 변한지 오래였다. 전등이 그의 손에 가려졌고, 전등의 빛은 그의 금빛 눈동자에 어른거렸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역시 어렵다는, 그러나 열정에 가득 차있는 목소리는 어른거리는 빛을 머금고 있었다. 

 

"퍼시벌 벤틀린!"

"아, 네!"

 

그는 자신을 부른 여성에게 다가갔다. 여성은 퍼시벌을 노려보고 있었으므로 이 시선은 결코 긍정적인 시선이 아님이 분명했다.

 

"구두를 닦아주련."

 

중년여성은 드레스를 살짝 잡아 먼지가 조금 묻어있는 구두를 드러냈다.

사내아이는 눈을 끔뻑였고... 이어 눈매가 크게 휘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인. 부인께서 수고스러우신 일이 없으시도록 하겠습니다."

순수하게 활짝 웃은 퍼시벌은 햇님보다 맑았고, 순진한 낯은 무릇 사람의 말을 안심시켰다. 주변에 있던 깨끗한 천으로 부인의 구두를 닦았다. 두 손으로 좌우 번갈아 닦으니 어느덧 구두가 말끔해진다.

 

"… 연습, 열심히 하더구나."

"네, 저에게 연극이 없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즐겁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노력을 인정받아 기쁜지 사내아이는 뺨을 긁적였다. 약간 불그스름한 피부와 붉은 입술, 화려한 눈매와 확실한 쌍커풀, 적당히 짙은 눈썹은 앳된 미소년의 얼굴이 부인의 눈동자에 비친다. 노란 금발의 머리카락은 고동빛깔의 검은 리본으로 묶어 성숙하다기에는 모자람이 있었다. 중년 여성이 말했던 그의 노력이 헛소리가 아니었는지, 고운 뺨을 타고 흐르는 땀줄기는 그가 얼마나 연극에 집중했는가에 대해 증명하고 있었다.

 

".. 하나 묻자꾸나. 그리 노력하면 결과가 있을거라 확답할 수 있느냐?"

 

금색의 눈동자가 구두에서 중년여성에게 향했다. 악의가 다분한 말투는 호의를 보이는 척, 상냥한 척을 하는 섣부른 악의였다. 그럼에도, 이에 대해 퍼시벌이 대답할 수 있는 답변은 명백했다. 순수한 소년은 조곤조곤 웃으며 대답하였다.

 

"네."

"오만하구나."

"설령 결과가 없을지라도..."

 

구두가 다 닦였는지 천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내려간다.

 

"연극을 사랑하는 제가 노력을 그만 둘 이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인, 부인께서도 일생을 매달려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으셨지 않으십니까?"

"무례한 아이구나. 그래, 나에게도 일생을 매달아 실현시키고 싶은 일이 있었단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되는 일은 없었지. 치기어린 다짐을 했던 탓에 아둔하기 짝이 없는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았고, 현실은 나의 치기어린 다짐의 불씨에 숨을 불어 단숨에 꺼버렸단다. 여린 불은 금방 꺼지고 말았고, 나는 나이가 든 하나의 인간이 되고 말았지. 그래도 다행인 것은 현재 이 자리에까지는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이겠지. 퍼시벌, 네 다짐이 얼마나 갈 것 같으냐? 네 다짐의 불씨가 꺼지지 않을 것 같으냐?"

여성은 그를 질책하고는 두 눈을 감았다. 아둔하고, 오만한 어린 아이. 치기어린 다짐은 얼마 안가 꺼지는 불씨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리 확신한 여성은 그의 미래를 단정지었고, 긍정적으로 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 부인의 일은 참 유감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연극을 사랑하기 때문에,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부인. 무언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떤 말에도 짓밟히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 강압적인 힘으로 제 꿈이 무너진다해도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에 아이는 웃음만을 유지하였다. 이것은 그가 밑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만든 생존법이었다. 그는 어떠한 모난 말에도 웃음을 유지할 줄 알았다. 문제라면 이러한 그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그를 바보취급한다는 것이다. 이런 바보같은 아이가 어떻게 연극을 하겠다고, 못해, 치기어린 다짐도 정도가 있지, 우리가 이걸 돌봐줄 이유가 있나? 우리도 먹고 살기 바빠, 바빠! 라는 변명으로 아이의 노력을 봐주려 하지 않았다.

 

시선이 등 뒤에서 느껴졌고, 퍼시벌을 뒤를 부드럽게 돌아 자신을 바라보는 인물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아이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으나 아이는 눈이 마주치자 급히 시선을 거두어버렸다. 얼굴을 잔뜩 붉힌 여자아이를 본 퍼시벌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말았지. 

"무슨 일이에요, 레인?"

공손한 말투로 퍼시벌은 여자아이를 불러세웠지만, 여자아이는 말이 없다 문을 향해 달려가버렸다.

퍼시벌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으나 그 뿐, 진실을 알 도리가 없었다.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퍼시벌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눈을 끔뻑이는 것 뿐이었다. 

 

"…?"


모든 것이 풍요로운 제국, 에페르디아. 이 제국은 황가의 힘이 강력하여 귀족의 세력이 질서정연하게 유지되었고, 제국민들이 신분을 금전으로 구매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화려한 보석들이 찬란하게 빛을 내고, 그 빛이 맞부딪혀 횟수만큼 권력이 되는 황가와 귀족들의 세계와는 다르게 평민은 질 낮은 환경에서 살아가며 굶주리고, 병을 앓다 사망하는 사례가 허다했다. 이에 대해 황가는 무관심의 태도로 일관하지 않았다. 제국민들을 위한 정책을 만들고 있었으나 아직까지 별 효과가 없는 상태였고, 때문에 불안정적인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언제 평민들의 반란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불길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제국력 532년, 

 

"연극계의 거장이 되고 싶습니다."

"… 포부가 크군."

"연극을 위하여 살아온 저는, 그 정점을 노리고 싶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분야에서 정점을 누리고 싶다는 것은, 당연한 욕구라 생각합니다."

 

뚜벅뚜벅, 값진 구두가 바닥과 마찰하여 투박하고 명확한 소리를 낸다. 15살 무렵의 아이를 내려다보는 덩치있는 남성은 꽤 위협적이었다.

 

"진정으로 자네의 꿈을 이룰 수 있다 생각하는가? 그래, 자네의 말이 맞네. 누구든 자신의 분야에서 정점을 누리고 싶다는 욕심은 가질 수 있고,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지. 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자는 한정되어 있다네. 그 자리에는 아무나 설 수 없고, 면적이 작은 땅을 모두가 밟을 수는 없어. 모두 자네처럼 욕심을 부리다 큰 화를 입고 스러지고 말았지."

"… 저의 포부는 그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어찌 그리 저의 미래를 확신하십니까? 스포트라이트의 빛, 관중의 소리없는 눈걸음, 조용하게 내려앉는 먼지의 소리, 빛의 색에 따라 달라지는 무대의 공기, 이것들을 사랑하는 저의 미래를 확신하지 말아주십시오. 지켜보십시오, 제가 과연 당신이 말한 스러지는 자일지, 아니면 정점에 올라 그 작은 땅을 딛고 올라선 자가 될지 지켜보시란 말입니다!"

 

부릅 뜬 아이의 눈에는 열정이, 연극에서 살아가며 웃고 있는 행복이, 스포트라이트의 빛이, 황금 빛의 포부와 그 위에 선 한 인간의 흩날리는 금발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아이는 눈 앞의 남성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물러선다면 자신은 그 무엇도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멍청하긴."

누군가 중얼거린다. 높고 앙칼진 목소리는 여자아이의 목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호기롭게 아이를 헐뜯은 여자아이는 거구의 남성과 눈이 마주치자 움찔거리고는 눈을 피했다. 아무리 기가 강한 여자아이라도 해도, 거구의 남성이 보내는 시선은 위협적일 것이다. 여자아이는 불안한 눈빛으로 이곳저곳 시선을 박아놓다 다시 슬쩍 시선을 돌렸다. 

 

"…."

무언의 말을 보내는 거구의 남성의 이름은, 레나드. 레나드는 두터운 손가락으로 퍼시벌의 눈 주변을 톡 건들었다. 그러고는 두 눈을 감아, 다시 심사위원의 자리로 돌아갔지. 무언은 즉 퍼시벌을 지켜보겠다는 말이었고, 그것은 그가 다소 무례하게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던 퍼시벌을 쫓아내지 않았던 것으로 증명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 남게 해, 포부를 보인 퍼시벌을 섭외하겠다는 뜻이었다.

 

"벤틀린 남작가의 퍼시벌 벤틀린, 너를 섭외하지." 

 

 

 


"거기."

 

집으로 돌아가려던 퍼시벌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뒤돌아보니 아까 자신을 멍청하다 여겼던 여자아이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지. 퍼시벌은 따스한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아이를 보고는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 

 

"네, 부르셨습니까? 네펠리 레인 씨."

"... 너, 내 이름을 알아?"

"네! 연극을 위해서는 모두와의 화합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모두의 이름을 외우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기억력도 좋네.."

의외의 퍼시벌의 특징에 여자아이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흔치 않게 당황한 눈치였고, 꿀이 섞인 붉은 눈동자는 눈을 감았다 떠, 다시 퍼시벌을 바라보았다.

 

탁.

부츠의 굽이 바닥과 맞부딪치고, 당당한 다리를 길게 쭉 뻗어 선명한 다리선을 드러내었다. 허리에 한 손을 얹고, 도도하게 퍼시벌을 내려보는 여자아이는 완벽하게 어여뻤다. 어여쁜 아이는 인형같았고, 외모를 관리하지 않아도 저 미모가 가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만한 반짝임을 지녔지. 그것은 새벽하늘을 떠도는 구름을 닮았기에, 퍼시벌은 그것이 기꺼워 웃어버린다. 퍼시벌의 웃음소리는 봄바람의 지저귐이었으니, 뭇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웃음소리였더라.

 

"하지만,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았더라도 네펠리 씨의 이름을 모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네펠리 씨의 외모는 멀리서도 눈에 띕니다."

"…불쾌하네."

"아, 불쾌했다면 죄송합니다."

 

퍼시벌은 바로 깍듯하게 허리를 90도로 굽혀 사과인사를 건넸고, 네펠리는 손을 뻗어 퍼시벌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농담 한 번 못하겠네…."

낮게 깔린 목소리가 퍼시벌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인상을 잔뜩 찌뿌린 여자아이는 오밀조밀한 입을 열었다. 

 

"내 허락없이, 나를 바라보면 가만두지 않아. 불쾌하니까... 누구 마음대로 나를 바라봐? 기가 막혀."

위협적으로 나온 네펠리는 금세 퍼시벌의 멱살을 놓았고,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것처럼 손을 탁탁 털었다.

 

"주제를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도 불쾌하고. 나는 내 이름을 부르라 허락한 적 없어. 성으로 불러."

" 알겠습니다, 레인 씨! 혹 더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퍼시벌을 바라보던 네펠리는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진짜 기가 막혀... 기분나쁘지도 않아? 왜 웃으면서 내 말을 맞받아치는 건데? ... 됐어, 없으니까."

 

인삿말은 하기 싫었던 아이는 퍼시벌을 홀로 남겨두고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가버렸다. 짧은 인사는 경박함이 있었으나 네펠리가 얼마나 성격 나쁜 아이인지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퍼시벌은 웃음기를 지우고 멱살이 잡혔던 탓에 구겨졌던 셔츠를 폈다. 

"… 기가 막히네요.. 그런가요? 기분나빠야하나요? ..."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방금까지 순수한 낯빛의 아이의 목소리였는지 확신하지 못할정도로 음산했다. 퍼시벌은 잠시 시선을 돌려 뉘엿뉘엿 지고 있는 창문 너머 하늘을 바라보았다.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공기와는 달리 째깍째깍, 흘러가는 시계의 초침소리는 빨랐다.